[문화의 재발견 92 - 큰 호수의 나라 ‘니카라과(Nicaragua)’]
[문화의 재발견 92 - 큰 호수의 나라 ‘니카라과(Nicaragua)’]
  • 최정윤 기자
  • 승인 2019.07.10 1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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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카라과 공화국은 중미에서 가장 넓은 나라로 수도는 마나과이다. 북동쪽은 온두라스, 남쪽은 코스타리카, 동쪽은 카리브 해, 서쪽은 태평양에 접하고, 남서쪽 카리브 해에는 콘 제도와 미스키토 제도가 있다.

동쪽 열대성의 카리브 해 저지 평야는 평균 너비 100㎞로 연중 비가 많고 무더우며 소택지와 열대 우림이 뻗어 있고, 마호가니가 산출된다. 연안의 저지 대부분은 모스키토(미스키토) 해안으로 사람이 거의 없는 늪지대와 숲인데 해안의 일부에 바나나 농원이 있다. 태평양 연안의 서부는 대부분 계곡으로 해안을 따라 화산이 분출하며 토양도 비옥하다. 북쪽 폰세카 만에서 남쪽 살리나스 만까지 낮은 평야에 둘러싸여 있고, 화산들과 중앙 산악지대 사이에 분지가 가로놓여 있다. 중미에서 가장 큰 니카라과 호(8,157㎢)와 마나과 호(1,035㎢)가 있다. 태평양 연안과 2대 호수 사이가 이 나라의 심장부로 산업이 집중해 있고 전체 인구의 약 80%가 살고 있다. 중앙 산지는 화산과 지진 활동이 빈번한 고원으로, 기후도 온화하여 목축과 금, 은 등의 광산지대이다. 주요 강들은 중앙 산악지대에서 발원한다. 태평양이나 2대 호수로 흘러 드는 서부 강들은 길이도 짧고 유량도 적다. 그 중 주요 강은 폰세카 만으로 흘러 드는 네그로 강과 에테로 레알 강, 태평양으로 흘러 드는 타마린도 강이다. 동부의 강들은 서부보다 긴데, 코코 강(780㎞)은 온두라스와 국경을 이루며 최북단 해안을 통해 카리브 해로 간다. 니카라과 호와 카리브 해를 잇는 남부 산 후안 강(200㎞)은 코스타리카와 국경을 이루며 흐르다 카리브 해로 간다.

기후는 열대기후로 건기(1∼5월 중순)와 우기(5월 중순∼12월)가 있다. 연평균기온은 서부 27℃, 동부 26℃이고, 연 강우량은 각각 약 서부 1,910㎜, 동부 3,810㎜로 동부가 훨씬 습하다. 북부 산악지대는 연평균기온이 18℃로 더 서늘하다.

역사를 보면, 고대에 남미 인디언들이 니카라과 서부의 태평양 연안으로 건너와 정착했고, 10세기에 멕시코와 중미 인디언들이 들어왔다. 1502년 콜럼버스가 니카라과 동부의 카리브 해 연안에 상륙했고, 1522년 스페인의 힐 곤잘레스 다빌라가 이 곳을 정복하려 했지만 니카라과 호 주변의 원주민 부족장 니카라오의 지휘로 이를을 쫒아냈다. 항구적 식민지화는 1524년 스페인 탐험가이자 군인 헤르난데스 데 코르도바에 의해 시작됐다. 스페인의 니카라과 정복으로 100만 명이던 원주민 인구가 30년 만에 수만 명으로 줄었는데 절반은 구대륙의 전염병으로 죽고, 생존자 대다수는 신대륙의 타 스페인 식민지에 노예로 팔렸다. 인구 격감 후 니카라과는 스페인 제국의 관심권 밖 변경지대로 평화를 누렸는데, 서부 내륙의 식민 도시 그라나다와 레온이 부상했다. 보수 귀족 지주들의 그라나다는 농업과 산 후안 강을 통한 스페인과 무역에 의존했고, 자유분방하고 지적인 레온은 태평양 연안의 스페인 식민지들과 교역에 의존했다. 17세기 말 영국이 카리브 해 연안 모스키토 인디언들과 동맹으로 정착해 1740∼86년에 이곳을 보호령으로 삼았다. 1811년, 멕시코, 엘살바도르의 반 스페인 투쟁에 편승해 니카라과 통치 행정관을 몰아냈다. 그러나 레온은 왕당파로 돌아섰고 그라나다는 불충의 대가를 치렀다. 1821년 중미 식민지들이 과테말라에서 독립을 선언할 때도 레온은 거부하고 그라나다는 동의했다. 두 도시는 독립을 이루는 멕시코와의 합병(1822∼23)을 함께 받아들였지만 내내 갈등하다 1823년 중미연방에 가입했다. 니카라과는 1838년 연방에서 탈퇴하고 독립했다. 그 후 레온과 그라나다는 각각 자유당, 보수당의 거점이 되었다. 1848년 영국인들은 카리브 해 연안의 작은 항구 산 후안 델 노르테를 점령하고 이곳을 그레이 타운이라 개명했다. 캘리포니아에서 금이 발견되자 대서양과 태평양을 잇는 횡단로로서 니카라과의 중요성이 부각되었다. 1855년 보수당과 내전 중 자유당의 요청으로 미국인 윌리엄 워커가 용병들과 니카라과에 잠입했다. 그는 1856년 니카라과 대통령에 올랐지만 이듬해 중미의 5개 공화국과 밴더빌트 증기선회사의 연합세력에게 패했다. 보수당 정권의 1857∼93년간 니카라과는 평화를 누렸으나 민주주의는 없었다. 자유당과 보수당의 관계 때문에 레온과 그라나다로 수 차례 옮겨졌던 수도가 1857년 두 도시의 합의로 마나과로 정해졌다. 동부의 모스키토족에 대한 관할권은 호세 산토스 셀라야 대통령(1893∼1909) 때 확립되었다. 그는 중미 재통합 계획을 추진하고 운하 건설권의 미국 양여를 거부해 미국은 운하 건설지로 파나마를 선택했다. 그가 일본과 미국간 운하를 경쟁시킨다는 소문이 돌자 미국은 보수당의 반란을 부추겼다. 반란에 가담한 미국인 용병 2명이 처형되자 미국은 블루필즈에 해병대를 상륙시켜 자유당의 승리를 차단했다. 결국 셀라야 사임 후 호세 마드리스(1909∼10)도 미국은 인정치 않았다. 내전 끝에 1911년 보수당 아돌포 디아즈 (1911∼17)가 들어섰고, 이들을 위해 미국은 1912년 해병대를 파견했다. 미 대사관에 주둔한 해병대는 보수당 에밀리아 차모르 바르가스 대통령(1917∼21)과 그의 삼촌 디에고 마누엘 차모로 대통령(1921∼23)에 대한 미국 지지를 상징한다. 미국은 브라이언-차모로 조약(1914 서명, 1916 비준)에 따라 운하 독점권을 확보했고, 1933년까지 니카라과에 해병대를 계속 주둔시켰다. 1925년 미 해병대가 일시 철수하자 쿠데타로 정권을 재 장악한 에밀리아노 차모로 바르가스는 미국과 중미 국가들의 거부로 물러가고 아돌포 디아즈가 다시 대통령이 되었다(1926∼28). 자유당 지도자 호세 마리아 몬카다, 후안 바우티스타 사사카, 세사르 아우구스토 산디노는 반란을 일으켰다. 미국은 보수당 디아즈 대통령을 위해 1927년 해병대를 파견했다. 몬카다(1928∼33년)와 사사카(1933∼36년)는 6개월 후 미국의 내전 종식 협상을 받아들여 1928년과 1932년 미국 후견 하의 선거에서 대통령이 되었다. 그러나 산디노는 1933년 1월 미 해병대가 철수하고 사사카가 취임할 때까지 반미 투쟁을 계속했다. 1934년 국민방위군 사령관 아나스타시오 소모사 가르시아 장군 휘하의 장교들이 산디노를 암살했다. 이어 소모사 가르시아는 자유당, 보수당내 파벌세력들의 후원을 받아 사사카 대통령을 축출(1936)하고 1937년 1월 단독 출마해 대통령이 되어 헌법 개정으로 20년 동안 철권을 휘둘렀다. 1930년대부터 수출이 늘었지만, 부의 수혜자는 소모사 가와 추종세력들이었다.

소모사 가르시아는 1956년 9월 21일 시인 리고베르토 로페스 페레스에게 저격당해 8일 후 죽었다. 큰아들 루이스 소모사 데바일레가 1957년 2월 선거로 대통령이 됐다. 그는 아버지보다 온건하게 통치하고, 1960년 온두라스와의 오랜 국경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양보책을 수용했다. 1962년 카를로스 폰세카, 실비아 마요르가, 토마스 보르게 모르티네스가 소모사 체제 전복을 위해 사회주의 무장조직인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FSLN)을 결성했다. 1934년 암살된 혁명 영웅 산디노의 이름을 딴 FSLN은 노동자, 농민들로부터 광범위한 지지를 얻었다. 소모사 가는 1963년 레네 구티에레스 대통령을 꼭두각시로 내세우고, 1966년 그가 죽자 로렌소 구에레로 구티에레스를 대리인으로 내세웠다. 경제는 성장했으나 국민은 여전히 가난했다. 1967년 초 루이스 소모사가 죽자 동생 아나스타시오 소모사 데바일레가 형식적 선거로 수개월 후 대통령에 올랐다. 그는 1972년 5월 대통령직을 사임하고 정치를 3두체제에 맡기는 한편 국민방위대 총사령관직만 유지했다. 그는 1974년 니카라과 역사상 10번째 헌법 제정으로 스스로 대통령에 올라 연임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그 해 말 2개의 반대세력인 FSLN와 일간지 ‘프렌사’의 편집인 겸 발행인 비올레타 바리오스 데 차모로의 조직이 민주자유연합(UDEL)을 소집했다. 1974년 12월 FSLN은 소모사 진영의 주요 인사를 납치해 정치범 석방의 대가를 얻었다. 이에 보복으로 정부는 2년 6개월 동안 대대적인 반군 소탕작전에 나섰다. 이때 FSLN 지도자 카를로스 폰세카와 수천 명의 무고한 농민이 살해되었다. 1978년 1월 ‘프렌사’ 편집인 페드로 조아킨 차모로가 암살되자 동맹파업과 폭력사태가 잇따르며 몇몇 주요 도시가 FSLN에 함락되는 등 봉기가 확산되었으나 결국 진압되고 수천 명이 죽었다. 이듬해 7월 FSLN은 마지막 공세로 도시들을 장악했다. 아나스타시오 소모사는 7월 17일 대통령직을 사임하고 망명했으며 이틀 후 FSLN이 마나과에 입성하고 국민방위군이 항복하며 46년간의 소모사 체제가 끝났다. 1979년 7월 FSLN은 국가재건 임시정부 수립 및 이듬해 5월 국가회의를 구성했다. 1979∼80년 산디니스타 정부는 소모사 가와 그 일당 및 지지자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민간 은행과 보험회사, 광물, 임업 자원을 국유화했으며 식료품 수출입을 통제했다. 개인의 기본적 권리와 자유를 보장하는 헌법이 제정되었다. 산디니스타 정부는 비 공산권 국가들과 관계를 확대했으나 쿠바를 비롯한 사회주의권 국가들과 밀월 관계를 유지했다. 1981년 레이건 대통령은 니카라과에 원조 중단 및 '콘트라 반군'의 훈련, 무장을 위해 약 2,000만 달러를 지원했다. 콘트라 반군은 미국 CIA의 지원 하에 온두라드, 코스타리카 접경지역 오지에서 지구전을 펼쳤다. 1984년 11월 FSLN의 다니엘 오르테가 사베드라가 65%의 득표로 이듬해 1월 대통령에 취임하고, 신헌법 마련을 위한 의회가 구성됐다. 미국은 1982년부터 니카라과 지원 요청을 봉쇄하고, 1985년 대 니카라과 금수조치를 내렸다. 미국의 적대적 조치와 내전에 따른 손실 및 경제적 혼란, 산디니스타 정부의 정책적 오류가 맞물려 니카라과 경제는 1985년부터 하락했다. 1987년 1월 산디니스타 정부는 자유선거를 위한 신 헌법을 제정했고, 그 해 미국 의회는 정부의 콘트라 반군에 대한 추가지원 요청을 거부했다. 이로써 그 해 8월부터 니카라과 내전은 군사적 문제에서 정치적으로 옮겨갔다. 1988년 인플레이션이 30,000%를 넘자 산디니스타 정부는 이듬해 긴축정책을 실시하며 보건, 교육, 주택, 영양 예산이 크게 삭감되었다. 1990년 2월 25일 자유선거가 실시되었고 선거 기간 중 콘트라 반군의 활동이 강화되었다. 미국 지원의 국민야당연합(UNO)의 비올레타 바리오스 데 차모로(암살당한 차모로 아내)가 승리하며, 그 해 4월 25일 정권 교체가 이루어졌다. 차모로 정부는 산디니스타 정부의 많은 정책을 폐기했다. 신 자유주의 경제정책으로 공기업 민영화, 공공부문 지출 삭감, 소농의 내수식량 생산보다 수출을 위한 대규모 농업이 강조되었다. 차모로 정부는 보수적이었으나 국민화해에 관심이 높았다. 1990년 6월 콘트라 반군 해산 및 의회에서 FSLN 및 일단의 UNO 온건파와 암묵적으로 연대했다. 1990년대 초 경제가 침체하며 긴축정책으로 인플레이션은 잡혔으나 실업과 가난한 국민의 고통이 늘며 사회가 양극화하고, 옛 콘트라 반군과 전역 군인들이 재무장해 폭력사태를 일으켰다. 차모로 대통령은 7년간 민주주의 발전과 국민화합, 경제안정, 공기업 사유화, 인권향상 등에서 괄목한 발전을 이룩했다. 1994년 제정된 군법으로 1995년 산디니스타 인민군 사령관 움베르토 오르테가 장군이 물러나고 이름도 니카라과 국군으로 바뀌었다. 자유롭고 공정한 1996년 10월 대통령 선거에서 중도좌파의 자유연합 후보인 아르놀도 알레만이 당선되며 1997년 1월 10일 민주적으로 선출된 대통령들 간의 정권 이양이 처음으로 실현되었다. 2007년에 다니엘 오르테가가 대통령으로 재선되었다. 그는 2008년의 안데스 외교 위기에 뒤이어, 2008년 3월 6일 에콰도르와 연대하여, 콜롬비아와의 외교 관계를 단절했다. 최근에는 러시아에 이어 압하지야와 남오세티아의 독립을 인정했다.

남벌에 대한 통제가 잘 안되나 니카라과 산림은 중미에서 가장 크다. 열대림이 국토의 1/3 이상을 덮고 있는데 동부의 카리브 해 저지의 경우 대부분이 사바나 지역이지만 모스키토 해안은 열대 우림으로 덮여 있다. 서부 화산지역과 주변 저지, 호수 지역에 인구, 도시, 산업이 몰려 있고 농산물도 대부분 여기에서 생산된다. 중부 산악지대 서쪽 계곡에도 상당수 주민이 거주하며 전체 농산물의 약 25%가 이곳에서 생산된다. 20세기 후반 많은 서부인들이 농사나 목축 그리고 벌채를 위해 인구는 적은 넓은 동부 지역으로 옮겨갔다.

니카라과는 전형적인 저개발국으로, 주요 수출품은 면화(25%), 쇠고기(7%), 커피(13%) 등이다. 면화와 커피는 플랜테이션에 의해 재배된다. 또한 이들 농작물은 대체로 태평양 연안과 2대 호수 사이의 지역에서 생산된다. 어업과 목재는 주요 산업이었다. 니카라과는 스페인과 쿠바의 영향으로 스페인, 쿠바 문화가 많이 발달되어 있다. 니카라과 사람들은 야구를 매우 즐기며 국기로 불릴 정도로 그 인기가 높다.

국토 면적이 중미에서 가장 넓으나, 인구밀도는 가장 낮다. 인종 구성은 메스티조 69%, 백인 17%, 흑인 9%, 인디오 5% 등이다. 거의 900만에 달하는 주민 대부분이 서쪽 태평양 연안 지역에서 산다.

종교는 로마 카톨릭이 85%로 절대 다수이고, 개신교 17.3%, 인디오 고유의 종교들도 존재한다.

언어는 스페인어가 공용어이다. 그 외에는 영어와 대서양 해안의 크리올어를 사용하는 사람도 있다.

큰 호수의 나라 ‘니카라과((Nicaragua)’는 어디에서 유래된 말일까?

‘Nicaragua’의 어원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첫째, 니카라과 호 주변 지역의 원주민 부족장 니카라오(Nicarao)의 이름을 따서 스페인의 식민지 사람들이 만든 이름이라는 설이다. 둘째, 나후아틀어로 원주민 마을 이름 ‘Nicarao’와 스페인어 ‘agua(물)’가 합성되어서 ‘Nicaragua’로 최종 정착을 했다는 설이다. 셋째는, 토착어로 ‘물에 둘러 쌓인’ 의미인 ‘Nicarao’에서 단어가 파생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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